2017년 코다국제컨퍼런스의 참관기입니다.
7월 13일부터 16일까지 캐나다 밴쿠버에서 코다국제컨퍼런스(Coda international conference)가 열렸습니다.
이 학회는 Coda international이 매년 개최하는 국제적인 행사로 11개국에서 온 300여명의 코다가 모인 자리인데요. 이곳에서 우리는 코다의 정체성, 사회 여러 문제에서 기대할 수 있는 코다의 역할(코다의 가능성), 코다의 다양성, 그리고 농인과 함께 일하는 코다 등 많은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다음 컨퍼런스에서는 더 많은 아시안 코다들이 참여할 수 있길 바라며.
행사에 참여한 이현화 국립국어원 특수언어진흥과 주무관의 후기입니다.
코다 월드, 새로운 세상
3년 전, 나는 유엔 장애인권리협약 관련 회의에서 한국수어-한국어 통역을 하기 위해 스위스에 갔었다. 그 곳에는 한국어, 한국수어, 영어, 프랑스어 등 여러 언어가 있었고 그 당시 한국에서는 보기 쉽지 않았던 국제수어도 있었다. 그 자리에는 영어를 국제수어로 통역하는 통역사가 3명이 있었고 나는 같은 통역사로서 그들의 통역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3명 모두 통역의 수준이 굉장히 높았는데 뒤늦게 그들이 CODA(Children of Dear Adults, 이하 ‘코다’) 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통역 중간에 교대를 할 때면 나란히 앉아 쉬거나 이야기를 나누고는 하였다. 그때 국제수어통역사 중에 한명이 나에게 미국에 ‘코다 인터네셔널(Coda international)’이라는 조직이 있고 그 조직이 매년 전세계의 코다들이 모일 수 있는 큰 행사를 개최한다고 알려주었다. 그런 조직이 있다는 것에 놀라고 반가웠지만 거리·비용 등 물리적 조건으로 인해 내가 그곳에 갈 수 있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나는 올해 6월 코다 인터네셔널 컨퍼런스의 등록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2017 컨퍼런스의 개최지인 밴쿠버에 도착하였고 오랜 비행에 지친 나는 호텔에 들어가 바로 잠을 청하였다. 잠이 겨우 들었을 때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에 잠이 깼다. 그녀는 나와 방을 함께 쓰기로 한 코다였는데 잠에서 깬 나를 보고 미안하다고 사과하며 나를 안아보아도 되는지 물었다. 얼떨결에 나는 그녀와 포옹을 나누었고 그렇게 코다 월드로 빨려 들어갔다.
그 곳에는 11개국에서 온 300여명의 코다가 있었다. 이 컨퍼런스를 32번이나 참석한 코다부터 나처럼 이번 컨퍼런스가 처음인 코다도 있었다. 우리는 외국에서 오랜 시간 외로이 지내던 한국인이 같은 한국인을 만났을 때 동질감을 느끼고 행복해하는 것처럼 그렇게 서로에게 완전히 공감하며 끝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곳에서 나는 나의 부모가 농인이며 내가 수어를 할 줄 안다는 것을 긴 문장으로 구구절절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되었고, 당연히 “그럼 너희 부모님 운전할 줄 알아?”, “티비는 볼 수 있어?”, “점자 읽을 수 있어?” 같은 황당한 질문을 받는 경험을 하지 않아도 됐다. 나는 나로서 오롯이 존재할 수 있었다.
수많은 코다들과 인사를 나누던 중에 어떤 코다가 이 컨퍼런스에 처음 오게 되었던 계기를 “I wanted to belong to something(나는 어딘가에 소속되고 싶었다).” 이라고 말하였다. 많은 코다들이 농사회와 청사회의 중간에 있으며 농인과 수어를 사랑하고 청사회보다 농사회에 더 정서적으로 친밀함을 느끼지만 그 어느 곳에도 완전하게 꼭 들어맞는다고 할 수 없었고 어딘가에 속하고 싶었다고 하였다. 그렇게 이곳을 찾게 되었다고. “나는 샌드위치에 낀 고깃덩어리처럼 중간에 끼어있는 존재라고 느꼈다.”고 말한 어느 코다의 인터뷰처럼 코다 월드를 알기 이전의 우리의 정체성은 농사회와 청사회의 그 중간 어디쯤에선가 떠다니고 있다고 느꼈다. 하지만 그곳에 바로 코다 월드가 있었다. 농인도 청인도 아니라고 생각한 나는 코다였고 그 세계는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곳에서 우리는 서로를 CODA, 아직 성인이 되지 않은 코다를 KODA(Kid of Deaf Adults), 농인의 손자를 GODA(Grandchild of Deaf Adults), 코다의 자녀를 COCA(Children of Coda adults)라고 명명하며 우리의 문화와 언어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곳에서 만난 한 코다는 나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 “수어와 농문화가 어째서 농부모의 것이기만 하냐, 내가 그것을 부모로부터 물려받았고 그 언어가 이미 나에게로 왔으니 그것은 나의 언어이고 나의 문화이지 않냐.” 그렇다. 그렇게 코다 월드에서 코다의 언어와 문화는 전승되고 있었다.
지금도 농사회와 청사회 그 어딘가를 표류하고 있을 코다에게 이 말을 전하고 싶다. “너는 혼자가 아니다.”
2017년 코다국제컨퍼런스의 참관기입니다.
7월 13일부터 16일까지 캐나다 밴쿠버에서 코다국제컨퍼런스(Coda international conference)가 열렸습니다.
이 학회는 Coda international이 매년 개최하는 국제적인 행사로 11개국에서 온 300여명의 코다가 모인 자리인데요. 이곳에서 우리는 코다의 정체성, 사회 여러 문제에서 기대할 수 있는 코다의 역할(코다의 가능성), 코다의 다양성, 그리고 농인과 함께 일하는 코다 등 많은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다음 컨퍼런스에서는 더 많은 아시안 코다들이 참여할 수 있길 바라며.
행사에 참여한 이현화 국립국어원 특수언어진흥과 주무관의 후기입니다.
3년 전, 나는 유엔 장애인권리협약 관련 회의에서 한국수어-한국어 통역을 하기 위해 스위스에 갔었다. 그 곳에는 한국어, 한국수어, 영어, 프랑스어 등 여러 언어가 있었고 그 당시 한국에서는 보기 쉽지 않았던 국제수어도 있었다. 그 자리에는 영어를 국제수어로 통역하는 통역사가 3명이 있었고 나는 같은 통역사로서 그들의 통역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3명 모두 통역의 수준이 굉장히 높았는데 뒤늦게 그들이 CODA(Children of Dear Adults, 이하 ‘코다’) 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통역 중간에 교대를 할 때면 나란히 앉아 쉬거나 이야기를 나누고는 하였다. 그때 국제수어통역사 중에 한명이 나에게 미국에 ‘코다 인터네셔널(Coda international)’이라는 조직이 있고 그 조직이 매년 전세계의 코다들이 모일 수 있는 큰 행사를 개최한다고 알려주었다. 그런 조직이 있다는 것에 놀라고 반가웠지만 거리·비용 등 물리적 조건으로 인해 내가 그곳에 갈 수 있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